작성자 : 222 / 작성일 : 2014-12-24
쓰면 살고 안 쓰면 죽는다. 소비의 천국이라는 미국을 설명할 때 나오는 말이다. 소비가 죽으면 경제도 죽는다는 말이 된다. 기자와 가족이 머무는 주변을 살펴보더라도 세계 최대의 소매업체라는 월마트를 비롯해 수많은 점포들이 있다. 소비의 대상이 되는 상품들을 꼽아보자면 그나마 익숙한 중국산(made in china)를 비롯해 방글라데시, 베트남, 인도, 잠비아 등 원산지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인종의 전시장이라는 미국은 세계 각국에서 만든 물건들의 박람회장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겼다. 이렇게 많은 물건들이 있는데 불량품 시비는 없을까 하고. 몇 개월 경험이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내린 결론은 저가품은 있지만 ‘불량품은 없다’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치른 가격(돈값)만큼 값어치를 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식품으로 한정해 보자. 다양한 점포들을 꼽아보자면 뉴요커들이 많이 찾는다는 유기농 제품 전문매장인 Whole Foods부터 이민자 출신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많이 찾는 매장들까지 다양하다. 이곳들은 채소부터 물까지 가격대가 천차만별이다. 대개 돈많은 백인들이 많이 찾는 매장쪽 물건이 비싸다. 먹거리로 눈을 돌리면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고 맥도날드에서 몇 달러에 먹을 수 있는 햄버거도 있다.
그러면 비싼 곳 상품들은 우량제품이고 싼 곳 상품들은 불량품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도 당연히 아니오(No)다. 가격만큼 제품의 효용을 누린다는 생각을 소비자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싸게 샀으니 비싼 상품만큼의 만족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도 된다.
기자의 경험을 들어보자. 중국산을 비롯한 저가제품이 상대적으로 많은 월마트에서 있었던 일이다. 영화 코너를 뒤적이다 재미있는 DVD 하나를 발견했다. 서부영화 10여편이 들어있는데 가격이 5달러 정도에 불과했던 것. 뒤편 영화제목들을 얼핏 살펴보니 60 ~ 70년대 수정주의 서부극의 고전쯤으로 통하는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한국 개봉 제목은 ‘내일을 향해 쏴라’다)가 눈에 띄는 것이 아닌가. ‘이 영화도 들어 있는데 공DVD 정도 이 가격이라니 살만 한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 주연 영화배우(로버트 레드포드, 폴 뉴먼)와 감독이 눈에 익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 자세히 살펴보니 고전 영화 제목과도 달랐다. 진짜 제목은 ‘Sundance Cassidy and the Butch Kid’였다. 원작을 어설프게 비튼 싸구려 영화일 가능성이 높았고 이내 살 생각을 접었다.
하지만 DVD 어디에도 소비자들을 현혹하는 문구는 없었다. 물론 착각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말이다. 차분히 생각해 보고 사면 손해볼 일은 없다는 말도 된다. 그 DVD를 산다면 킬링타임용으로 몇시간 딴 생각은 안 하고 TV화면에 빠져들 수도 있으니 ‘속았네’라고 생각할 일만도 아니다.
생각해 보니 미국 영화에는 1억 달러 이상 물량을 투입하는 블록버스터도 있지만 수만 ~ 수십만 달러로 끝내는 저예산, B급 영화도 있다. 물론 형편없는 블록버스터도 있고 대박을 치는 B급 영화도 있다. 고급제품부터 저가품까지 관객들의 선택의 폭이 그만큼 넓다는 말도 된다.
만약 구입한 상품에 만족하지 못 하면 어떻게 할까라는 질문에는 정답이 있다. 철저한 환불과 반품 제도가 그것이다.
한번은 월마트에서 산 가재도구 손잡이가 부러져 환불을 요구한 적이 있다. 아들 녀석이 장난삼아 갖고 놀다 그런 것이라 반품받을 수 있을지 은근히 걱정됐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월마트 직원은 영수증을 보여달라고 한 뒤 “환불이나 교환 중 어느 것을 원하느냐”는 질문뿐선선히 돈을 내줬다. 어떻게 부러졌냐는 묻지 않는 것이었다.
금융상품으로 눈을 돌려보자. 자동차보험을 예로 들면 한 회사의 보험상품 가격이나 서비스에 만족하지 못해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다른 곳이 더 싸다’, ‘서비스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라는 등의 이유를 대면 해지에 이의를 해기하지 못 하고 남은 보험기간의 차액을 내줘야 한다. 중도 해지에 따른 불이익이나 사업비 선결제가 문제인 우리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사용한 제품이라도 언제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환불과 교환이 생활화돼 있다. 사실 미국이 세계 소비시장의 중심이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기업이 미국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격·품질 경쟁력은 기본이고 소비자들을 위한 환불정책을 버틸 수 있어야 한다. 소비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밀려드는 반품 때문에 기업이 망할 수도 있다. 물론 주문과 반품을 전문으로 하며 혜택만을 찾는 이들로 골치를 앓기도 한다. 하지만 이건 필요악이라고 생각한다.
사족이지만 미국에서도 소비자들과 정부 등에서 공통적으로 난색을 표하는 것이 있다. 저가품인데도 가짜 상표같은 사기를 곁들여 비싼 값을 받아내거나 저작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돈이나 노력을 덜 들였으면서도 비싼 값을 받아내면 범죄로 간주하는 것이다. 미국이 표절이나 무단복제 등 저작권 문제에 왜 그렇게 민감한지, 중국의 짝퉁 명품에 왜 그토록 엄격한지에는 ‘싸구려를 명품처럼 포장’하려는 것에 대한 태생적 거부감도 작용하는 것이다.
이전글 : ESL 수업 듣기(연수기3)
다음글 : 출국에서 정착까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