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222 / 작성일 : 2014-12-24
주말 즈음에 거리에 나가면 ‘거라지 세일(Garage Sale)’이나 ‘야드 세일(Yard Sale)’이라는 작은 광고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거라지 세일은 미국인들이 집안에서 필요 없어진 세간살이를 주변에서 찾아오는 이웃들에게 헐값으로 판매하는 작은 개인 벼룩시장이다. 차고(Garage)나 마당(Yard)에 물건들을 진열해놓고 처분한다는 의미에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벼룩시장 둘러보는 것을 좋아했기에 주말에 딱히 할 일이 없으면 집 근처의 거라지 세일을 몇 군데씩 둘러봤다. 거라지 세일은 거리 광고판을 보고서 가기도 하지만, 금요일자 지역 신문이나 크레이그리스트, 페이스북 등 온라인 사이트에서 주소를 확인하고 찾아갈 수도 있다.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거나 혹은 물건이 부실한 거라지 세일도 간혹 있기 때문에 집에서 먼 곳까지 일부러 찾아가는 수고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아예 안 가보느니만 못한 후진 거라지 세일을 일컫는 Garage Fail 이라는 단어도 있단다). 아무래도 중산층이 모여 사는 지역을 골라서 찾아가야 좋은 물건들을 저렴하게 구할 확률이 높다는 점도 알아둘 만하다.
거라지 세일에 실제 가보면 정말 새것 같이 반짝반짝 좋아 보이는 가구나 전자제품들도 눈에 띄지만 ‘아, 정말 이런 것까지 버리지 않고 내다파나’ 하고 입이 딱 벌어질 만큼 황당한 물건들도 여럿 진열돼 있다. 너덜너덜한 액자나 우그러진 숟가락, 얼룩 묻은 침대보, 이 빠진 그릇과 낡은 옷가지까지. 한국에선 진작에 쓰레기통으로 보내졌을 법한 물건들이건만, 미국 거라지 세일에선 이런 것들도 모두 돈을 내고 사는 상품이 되어 있으니 참으로 신기했다.
대부분 주인이 쓰던 중고품이기에 가격도 비싸지 않다. 가구나 전자제품은 덩치가 큰 물품이라 수십 달러를 줘야 살 수 있지만, 일반 생필품은 대부분 1~5달러 선이다. 25~50센트 가격표가 붙어있는 물건도 많고, 이마저도 흥정만 잘 하면 반값으로 깎을 수 있다. 심지어 공짜로 가져 가라는 경우도 있다. 차고에 있는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마음대로 집어가라고 했던 40대 미국인 남성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 날 책장에서 꺼낸 멀쩡한 해리포터 소설책 5권을 손에 들고서 ‘정말 공짜인가요?’라고 몇 번이나 물어봤었다. 한 번은 오후 늦게 거라지 세일에 들렀는데 주인이 파장을 앞두고 남은 물건들을 처분하려고 그랬는지 남은 물건을 무조건 25센트에 판다길래, 혹시 내가 영어 실력이 짧아 잘못 알아들었나 싶어 가격을 재확인해 보기도 했다(이날 책상 스탠드와 알파벳 장난감, 원목 체스세트를 단돈 75세트에 건졌다). 많은 사람들이 탐낼 만한 핫딜 물품은 아침 일찍 초반에 다 팔려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어머나, 이렇게 좋은 물건인데 엄청 싸네?’라고 생각하면서 자세히 살펴 보면 이미 ‘판매완료(SOLD)’라는 딱지가 떡 하니 붙여져 있었으니 말이다.
중고품을 파는 거라지 세일에 손님들은 얼마나 많이 찾아올까 궁금했는데 주말 이른 아침에도 북적북적 붐비는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우연히 길에서 광고판을 보고 나들이 삼아 구경 온 듯한 사람에서부터 미리 신문 광고를 체크하고서 구입을 목적으로 먼 데서부터 찾아오는 사람들까지 손님들도 무척 다양해 보였다.
물건 가격이 워낙 저렴하니 거라지 세일을 한다고 해서 목돈을 쥐긴 힘들다. 손님들 맞이하고 흥정해야 하는 하루 인건비로 따지자면 오히려 밑지는 장사가 아닐까 싶은데, 왜 수많은 미국인들이 황금 같은 주말에 버리면 그만인 헌 물건들을 가지고 거라지 세일을 여는 것일까. 나의 궁금증에 친절히 답해주던 60대 미국인 할머니의 대답이 기억에 남는다. “아직 멀쩡한 물건인데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기엔 아깝고, 내게 추억이 있는 소중한 물건을 누군가 가져가서 잘 써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것 아닌가요?” 앞으로 사용할 것 같지 않은 물건을 필요한 사람에게 싸게 혹은 공짜로 넘겨 주고, 남은 물건은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미국 문화가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
써야 할 때는 과감히 쓰되, 가치가 있는 물건은 단 1센트라도 헛되이 쓰지 않겠다는 미국인들의 실용적인 가치관을 접하고 나니, 집안에 있는 낡은 물건 하나하나에 애착을 갖게 된다. 한국은 멀쩡한 물건도 미련 없이 싹 없애고, 남이 입던 옷이나 남이 쓰던 가구를 갖고 있으면 부끄럽게 여기는 풍조이지만, 미국 거라지 세일을 가 보면 도무지 집에서 버릴 게 하나 없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소비 시장답게 엄청난 물건을 사용하고 있어 ‘낭비’란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지만, 이렇게 거라지 세일을 몇 차례 둘러보고 나면 중고품이라도 귀하게 여기고 이웃과 나눠 쓰는 재활용 문화도 분명히 공존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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