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선생은 30세가 되던 1946년 5월 귀국하였다.
지난날 쫓기던 망국의 소년이 아닌 떳떳한 광복조국의 포부에 불타는 한 청년으로 조국 산천을 밟았다.
그러나 대산선생 앞에는 경제, 사회의 대혼란과 심각한 국민 생활의 빈곤과 방황과 갈등, 불안과 실의만이 가득 차 있었다. 조국의 현실은 암담 그 자체였다. 대산선생은 조국에 헌신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기에 노력하였고, 한때 출판사업과 제철사업에도 노력을 기울였으나 하늘은 기회를 주질 않았다.
그러나 대산선생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더욱 큰 뜻을 세우고 전국의 도시와 농촌을 돌면서 현실 즉시와 지혜를 집중한 결과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 조국이 나아갈 길은 오로지 인력을 자원화하는 즉, 교육입국만이 유일한 대안임을 깨닫게 되었다.
아울러 조국의 경제재건을 위해서는 민족자본을 형성하는 일 또한 시급한 과제임을 통감하였다.
더구나 한국동란으로 강토가 파괴되고 생활이 더욱 피폐해짐에 따라 대산선생은 이 두 가지 과제 즉, 국민교육진흥과 민족자본형성이 필생 해결해야 할 과업임을 확신하고 나름대로 사업구상에 몰두하였다.
교육사업과 저축사업의 결합, 대산선생은 수년간 자료수집과 집중 연구를 통해 '교육보험'을 창안하게 되었다. 이는 세계 최초로 보험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대산선생의 집념의 결실이었다.
그러나 교육보험사업이 개화되기까지는 또 다른 난관이 있었다.
정부 당국은 선진국에 없는 보험이라 하여 인가를 내주지 않았고, 교육보험이라는 명칭을 사명(社名)에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회사 설립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산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선진국에 없으니 반드시 우리가 해야 한다고 수차례에 걸쳐 정부 당국을 설득하여, 불혹의 나이가 된 1958년 대한교육보험회사(현 교보생명)가 창립하게 되었다.
이는 대산선생이 필생의 과업으로 삼은 국민교육진흥과 민족자본형성의 이념을 구현하는 출발점으로, 어린 시절 일제강점과 청년 시절 한국동란의 뼈저린 체험을 통해 신념화된 조국애의 발로였다.